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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서울

조선시대의 서울


  14세기 말 15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을 창건하고, 그로부터 2년 뒤 새 나라의 수도를 서울(당시 한양)로 옮겼다. 서울의 인문지리적 측면, 경제·군사적 이점, 효율적인 국토 이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울은 단순히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된다.

   조선시대 서울은 진산인 삼각산(오늘날의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산세를 따라 백악(북쪽), 인왕(서쪽), 낙산(동쪽), 목멱(남쪽) 이렇게 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청계천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굽이쳐 한강에 합류한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자연 형세를 배경으로 성곽과와 성문이 자리 잡고, 그 안에 궁궐, 종묘와 사직, 관아와 시전 등의 시설물이 입지한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의 완공을 시작으로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었으며,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사간원 등의 통치 기구가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 일대에 자리했다.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중등 교육기관인 4부 학당도 사대문 안에 건립했다. 이로써 서울은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지 모습을 구축해 나갔다.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변방의 급한 소식은 봉수를 통해 중앙으로 보고되었다. 
 

좌:경북긍 근정전, 우:창덕궁 인정문


  한편 16세기 말 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겪게 된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조선 사회를 비롯해 서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국왕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정비하는 한편, 한양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수도의 방위 체계를 수립해 나갔다.
   이후 서울은 정치·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상업 중심의 도시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신분별로 지역별 주거지 특징이 나타나기도 했다. 청계천 북쪽 일대인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청계천 이남 지역인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종로 일대에 형성된 시전은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업지역이 종로 중심인 시전에서 벗어나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시장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서울의 학문과 문화의 변화를 동반했다.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도 출현했다. 실학의 대두와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18세기 서울 일대를 진경산수화풍으로 묘사한 정선은 관념적이고 명분론적인 사고를 대신해 현실에 대한 자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항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는 조선 후기 도시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항인들이 서울의 문학과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서울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종묘 영녕전(서울시 종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