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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서울

일제강점기의 서울


   조선왕조의 도읍지이자 대한제국의 황도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경기도에 속한 경성부라는 일개 도시로 격하되었다. 행정구역도 부제 실시와 함께 1/8로 축소되어 사대문 안의 도심부와 일본인 거류지였던 용산으로 줄어들었고, 이전 지역은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당시 서울은 한국인이 주로 거주했던 북촌과 일본인이 주로 거주했던 남촌으로 구별되는 이중적 도시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이 같은 도시 구조는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변화하였다. 도시 외곽지역으로의 이입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변부 인구의 현저한 증가는 1936년 시가지의 대폭적인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기존의 남촌과 북촌 중심으로 하는 표주박형 구조는 경기도에서 편입된 지역을 포괄하는 부채꼴형 구조로 변하게 되었다. 


좌 : 화신백화점, 우 : 서대문형무소


   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1920년대 초부터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는 조지아, 미나카이 등 백화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도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는데, 19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등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북촌에는 전통식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도시형 한옥이 늘어났다.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가 등장했고, 서양 영화는 더 이상 낮선 문화가 아니었다. 
   한편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의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만주와 연해주를 거쳐 미주 한인사회로까지 확산되었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는 항일독립운동의 발원지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각처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서울과의 연고를 강조하는 한성정부를 계승했음을 확인한 사실 역시 서울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상징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은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기 때문에 항일투쟁의 최종적인 공격과 파괴의 대상이었다. 일제 역시 같은 이유로 탄압조직과 인력을 서울에 집중시켰다. 한국인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수행했던 경찰서와 법원, 군부대 등 핵심 기관들이 서울에 집중되었다.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순국했던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곳도 서울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통해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서울은 침략을 뒷받침하는 병참기지의 중심축을 담당하였다. 1940년대 들어 서울에서 열린 각종 전쟁 찬양대회들은 식민통치의 핵심이 한국인들을 이용하는 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중심에는 서울이 있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 바로 옆의 부민관에서 열린 침략전쟁 선전대회장에 폭탄을 던진 의거는 독립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의 허위선전과 전시강제동원에 맞섰던 서울시민의 저항 의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20~30년대 서울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