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개항기와 대한제국기의 서울

개항기와 대한제국기의 서울

 1876년 조선은 처음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서구 열강과 수교하고 각종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서울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서울은 1895년 행정제도 개편 이후 경기도 산하의 군 단위로 격하되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서울 행정업무 영역과 호적업무가 축소되었고, 다른 토지 측량 업무가 추가되었다.
   개항은 서울의 경제적 위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무역과 외국인 진출의 거점으로 출현한 개항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인천 등지의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가 차원에서 서울이 차지하던 경제적 비중이 개항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서울과 지방을 이어주는 철도 등 교통이 발달하자 서울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조선시대 도성경제의 주축이었던 시전상인들은 종로의 소매점으로 존속하거나 근대적 기업가가 되기도 했다. 중간 상인이었던 객주는 정미공장을 건설하기도 하고 회사, 은행, 공장 등을 설립하는 신흥상인으로 변모하였다.  


좌 : 개항기 서울 시전 , 우 : 초창기 이화학당


    서울은 개항 이후에 계층 구성이 변하였고, 각 계층의 사회적 위상도 변화하였다. 우선 농업·철도·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노동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위한 취업 알선 단체 등이 생겨나기도 했다. 도시빈민층의 문제도 심각하여 서울에서는 이들을 위한 구제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은 여성들의 자각과 사회적 변화를 선도하였는데, 천주교를 비롯하여 여성 교욱에 앞장선 종교의 본산들이 모두 서울에 있었다. 여성교육기관도 크게 발달되어 다수의 일반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권리신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은 개화문물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개화지식 전파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신문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발간 되었고, 출판활동 또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범학교와 외국어학교, 의학교를 비롯한 개화를 이끄는 관공립학교도 서울에 우선적으로 설립되었다. 서양식 가옥· 음식·의류·신식 운송 수단인 전차 등 외국의 문화를 제일 먼저 접할 수 있는 곳도 서울이었다. 

   개항 이후 서울의 도시경관이 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의 상징적 도시경관은 경운궁과 정동지역의 이국적인 도시경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1907년 이후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 숭례문 주변 성곽이 훼철되고, 수도로서의 경관체계가 위협받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독립문·환구단·탑골공원의 건립, 방사선 도로의 개통 등 수도 서울은 황도(皇都)에 걸맞게 바꾸는 도시개조 사업도 실시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때 일제의 강압으로 주권이 훼손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대한제국 때의 광무개혁은 좌절되고,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탄되었다.







배재학당(서울시 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