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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서울

고려시대의 서울



   혼란스러운 후삼국시대를 수습한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체제 정비를 위해 940년에 지방 이름을 고치는데 이때 서울 지역도 ‘양주’라는 명칭이 제도적으로 자리잡았다.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양주도 고려의 지방으로서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995년에는 양주에 좌신책군절도사가 설치되어 해주와 함께 수도인 개성을 지키는 요충지가 되었다. 양주의 절도사는 1011년 안무사로 바뀌었지만 1018년에는 전국적인 속군·현 체제의 정비과정에서 9개의 속군·현을 거느린 대읍이 되었다.
   고려시대 양주 지역은 문종 때에 이르러 남경이 설치되었다. 즉 양주는 1067년에 남경으로 승격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여기에 새로운 궁궐이 지어졌다. 지금의 평양 지역인 서경, 경주 지역인 동경과 더불어 수도를 제외한 3경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문종은 개경과 서경을 강화하는 한편 남경을 설치하여 3경을 중심으로 왕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문종 때 설치된 남경은 숙종 때에 와서 재건되었다. 1096년 11월 김위제는 《도선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 등의 책을 빌어 남경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정치 상황과 숙종의 마음을 파악한 김위제가 풍수지리의 설을 이용하여 숙종에게 남경 재건의 상서를 올린 것이었다.
   남경 재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추진은 1099년부터 시작되었다. 1101년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고 종묘와 사직에 공사의 개시를 신고하였다. 곧이어 남경의 경계가 확정되고 3년만의 역사 끝에 궁궐도 완공되었다. 이에 숙종은 신하들과 같이 남경에 행차하였다.
   남경은 원간섭기인 고려 후기에 호칭이 격하되었다.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남경을 한양부로 개칭하고 그 관제를 개편하였다. 이는 개경·서경·동경도 해당되었다. 1310년에는 기존의 주·도호부 등도 부로 개편하였다. 이로써 기존 고려의 삼경제도는 소멸되었다.
   고려 말에는 이곳으로 천도가 시도되었다. 1356년 6월 남경에서 땅을 살펴보고 12월에는 남경의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남경 즉 한양부으로의 천도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357년 1월이 되면서 망설임이 있었으나 점을 쳐서 ‘動’자가 나오자 천도 준비가 다시 시작되었다. 남경 궁궐을 짓기 위해서 양광도의 한해 둔전 세금을 면제하는 조치가 내려졌고, 이제현에게 한양에서 집터를 보고 궁궐을 짓도록 하였다. 그런데 공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고려의 재정으로 부담하기가 어려워지자 한양 천도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1381년부터 한양천도론이 다시 일어났고, 이듬해 8월 천도를 결정했지만, 정치가 불안정해지자 6개월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우왕은 이후에도 한양 천도를 추진했으나, 이성계의 집권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2년(1390년)에도 서운관에서 천도를 주장하자 이듬해에 공양왕이 천도를 단행했지만, 5개월만에 다시 환도하고 말았다. 고려 말의 한양 천도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역성혁명을 통해 새롭개 개창한 조선은 국초에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하고 천도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수도로서 크게 번성하였던 한양의 이면에는 고려시대의 남경시절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낙성대의 안국사(서울시 관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