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란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 유물과 유적만이 남아 있는 시대로,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시대로 구분한다. 이러한 선사시대 사람의 흔적들은 그 지역이 사람이 살기 좋았던 지역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서울 지역도 그러한 면에서 어느 지역보다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인들의 집터 유적인 암사동 유적은 약 6,000년 전부터 이미 서울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2010년 이후 고덕동, 외발산동 등에서 구석기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명일동, 가락동, 역삼동에서도 청동기시대 집터가 확인되어 한강변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울의 선사시대 모습은 역사시대로 이어지는 철기시대와 연결되어 한강 지역 원주민들과 한반도 북쪽에서 이주한 세력들이 결합, 한국 고대의 중심국가인 백제의 건국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18년 온조는 현재의 서울인 위례성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백제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강화하여 한반도 중부의 최강자로 자리 잡는다. 특히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반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백제의 국가 성장에는 서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이 큰 몫을 했다. 광활한 평야지역은 경제적으로 큰 이점으로 작용했으며, 한강 유역이라는 위치는 대륙의 문화를 적절히 받아들이고 정치적 · 경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최적의 요소였다. 백제가 문화 뿐만 아니라 정치적 · 군사적으로 한반도의 강자로 군림한 이유는 서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에는 백제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존재한다.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무덤인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 등은 서울역사 2천년의 산증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유적에서 나온 다양한 유물들은 백제인들의 의식주는 물론 사상과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고대사에서 서울 지역은 백제의 역사만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다. 서울 지역은 이미 한국의 고대국가들이 항상 욕심내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삼국의 역사가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서울 지역을 차지한다. 이로 인해 백제 개로왕은 사망하고, 급하게 공주로 천도를 한다. 고구려는 이미 한반도의 최강자였지만, 5세기 후반 서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더욱 탄탄히 한반도의 강력한 국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의 아차산과 그 일대에서 확인되는 수십 개의 고구려 보루들은 서울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생생한 유적들이다.
백제는 빼앗긴 서울 지역을 다시 차지하고자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러한 백제의 노력은 551년에 결실을 맺는다. 백제와 신라는 강력한 상대인 고구려에 맞서 군사적 연합을 통해 서울 지역인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한다. 그렇지만 신라가 얼마 안 있어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는다. 553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강 하류 지역까지 빼앗은 것이다. 이에 백제는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 서울 지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삼국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제의 성왕은 554년 지금의 옥산인 관산성에서 사망하였고, 이로 인해 신라는 백제에 정치 · 군사적 우위를 획득한다.
이렇게 서울 지역을 차지한 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다. 그리고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서울 지역은 한주라는 이름으로 군사적 중요지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이러한 신라의 모습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장의사지 당간지주, 호암산성 등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서울은 한국의 고대국가를 대표하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역사를 모두 품고 있는데, 이 점이 서울 고대 역사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