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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타임라인

서울 명칭 유래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관해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신라 때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혁거세왕에 대한 내용을 보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고, 이후 이것이 도읍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수도(京)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서울은 백제 온조왕 때(기원전 18)부터 제21대 개로왕 때(475년)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오늘날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당시의 왕성이었고, 위례성, 혹은 한성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신주(新州)를 설치하였고(552년), 선덕왕 때에는 서울 지역을 한산주(漢山州)로 개칭(637년),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게 되면서 경덕왕 때에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치게 된다(757년).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서울 지역은 초기에는 양주(楊州)로 불렸다. 그 후 문종 때에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가(1067년), 원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중앙과 지방 조직을 개편하면서 한양부(漢陽府)로 바뀌게 되었다(1308년).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고(1394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울러 조선시대 정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이외에도 당시 만들어진 고지도나 문집 등에는 한양, 경도, 경성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된 하위 관청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대외적인 정식 명칭은 일본어 발음인 게이조라고 불렀다. 물론 경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던 것이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경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으로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단어로 변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서울은 서울, 경성, 한성 등 혼재된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공공기관들도 특별한 기준 없이 서울이나 경성 등으로 공문서에 표기했다. 그러다가 1946년 9월 18일 군정법령 제106호를 통해서 미군정은 서울이 갖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특별시라 명명하고, 경기도로부터 독립시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제정되면서 서울은 도와 동등한 서울특별시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게 됐다.

선사 및 고대

암사동 유적 체험마을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
몽촌토성
아차산성
신라진흥왕 순수비
암사동 유적 체험마을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
몽촌토성
아차산성
신라진흥왕 순수비
선사시대란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 유물과 유적만이 남아 있는 시대로,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시대로 구분한다. 이러한 선사시대 사람의 흔적들은 그 지역이 사람이 살기 좋았던 지역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서울 지역도 그러한 면에서 어느 지역보다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인들의 집터 유적인 암사동 유적은 약 6,000년 전부터 이미 서울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2010년 이후 고덕동, 외발산동 등에서 구석기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명일동, 가락동, 역삼동에서도 청동기시대 집터가 확인되어 한강변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울의 선사시대 모습은 역사시대로 이어지는 철기시대와 연결되어 한강 지역 원주민들과 한반도 북쪽에서 이주한 세력들이 결합, 한국 고대의 중심국가인 백제의 건국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18년 온조는 현재의 서울인 위례성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백제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강화하여 한반도 중부의 최강자로 자리 잡는다. 특히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반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백제의 국가 성장에는 서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이 큰 몫을 했다. 광활한 평야지역은 경제적으로 큰 이점으로 작용했으며, 한강 유역이라는 위치는 대륙의 문화를 적절히 받아들이고 정치적 · 경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최적의 요소였다. 백제가 문화 뿐만 아니라 정치적 · 군사적으로 한반도의 강자로 군림한 이유는 서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에는 백제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존재한다.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무덤인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 등은 서울역사 2천년의 산증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유적에서 나온 다양한 유물들은 백제인들의 의식주는 물론 사상과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고대사에서 서울 지역은 백제의 역사만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다. 서울 지역은 이미 한국의 고대국가들이 항상 욕심내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삼국의 역사가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서울 지역을 차지한다. 이로 인해 백제 개로왕은 사망하고, 급하게 공주로 천도를 한다. 고구려는 이미 한반도의 최강자였지만, 5세기 후반 서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더욱 탄탄히 한반도의 강력한 국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의 아차산과 그 일대에서 확인되는 수십 개의 고구려 보루들은 서울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생생한 유적들이다.
백제는 빼앗긴 서울 지역을 다시 차지하고자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러한 백제의 노력은 551년에 결실을 맺는다. 백제와 신라는 강력한 상대인 고구려에 맞서 군사적 연합을 통해 서울 지역인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한다. 그렇지만 신라가 얼마 안 있어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는다. 553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강 하류 지역까지 빼앗은 것이다. 이에 백제는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 서울 지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삼국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제의 성왕은 554년 지금의 옥산인 관산성에서 사망하였고, 이로 인해 신라는 백제에 정치 · 군사적 우위를 획득한다.
이렇게 서울 지역을 차지한 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다. 그리고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서울 지역은 한주라는 이름으로 군사적 중요지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이러한 신라의 모습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장의사지 당간지주, 호암산성 등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서울은 한국의 고대국가를 대표하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역사를 모두 품고 있는데, 이 점이 서울 고대 역사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낙성대의 삼층석탑(서울시 관악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삼선사지마애불
공암 허가바위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고려시대 남경 영역 복원도(1146년 기준)
낙성대의 삼층석탑(서울시 관악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삼선사지마애불
공암 허가바위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고려시대 남경 영역 복원도(1146년 기준)
혼란스러운 후삼국시대를 수습한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체제 정비를 위해 940년에 군현의 이름을 고치는데 이때 서울 지역도 ‘양주’라는 명칭이 제도적으로 자리잡았다.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양주도 고려의 주목으로서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됐다. 995년에는 양주에 좌신책군절도사가 설치되어 해주와 함께 수도인 개성을 지키는 요충지가 됐다. 양주의 절도사는 1011년 안무사로 바뀌었지만 1018년에는 전국적인 속군·현 체제의 정비과정에서 9개의 속군·현을 거느린 대읍이 됐다.
고려시대 양주 지역은 문종 때에 이르러 남경이 설치됐다. 즉 양주는 1067년에 남경으로 승격했고 그 이듬해에는 여기에 새로운 궁궐이 지어졌다. 지금의 평양 지역인 서경, 경주 지역인 동경과 더불어 수도를 제외한 3경의 하나가 된 것이다. 문종은 개경과 서경을 강화하는 한편 남경을 설치해 3경을 중심으로 왕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문종 때 설치된 남경은 숙종 때에 와서 재건됐다. 1096년 11월 김위제는 《도선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 등의 책을 빌어 남경의 건설을 주장햇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정치 상황과 숙종의 마음을 파악한 김위제가 풍수지리의 설을 이용하여 숙종에게 남경 재건의 상서를 올린 것이었다.
남경 재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추진은 1099년부터 시작됐다. 1101년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고 종묘와 사직에 공사의 개시를 고했다. 곧이어 남경의 경계가 확정되고 3년 만의 역사 끝에 궁궐도 완공됐다. 이에 숙종은 신하들과 같이 남경에 행차했다.
남경은 원간섭기인 고려 후기에 호칭이 격하됏다.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남경을 한양부로 개칭하고 그 관제를 개편했다. 이는 개경·서경·동경도 해당됐다. 1310년에는 기존의 주·도호부 등도 부로 개편했다. 이로써 기존 고려의 삼경제도는 소멸됐다.
고려 말에는 이곳으로 천도가 시도되었다. 1356년 6월 남경에서 땅을 살펴보고 12월에는 남경의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남경 즉 한양부으로의 천도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357년 1월이 되면서 망설임이 있었으나 점을 쳐서 ‘動’자가 나오자 천도 준비가 다시 시작됐다. 남경 궁궐을 짓기 위해서 양광도의 한해 둔전 세금을 면제하는 조치가 내려졌고, 이제현에게 한양에서 집터를 보고 궁궐을 짓도록 했다. 그런데 공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고려의 재정으로 부담하기가 어려워지자 한양 천도는 사실상 중단됐다. 그러나 1381년부터 한양천도론이 다시 일어났고, 이듬해 8월 천도를 결정했지만, 정치가 불안정해지자 6개월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우왕은 이후에도 한양 천도를 추진했으나, 이성계의 집권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1390년 서운관에서 천도를 주장하자 이듬해에 천도를 단행했지만, 5개월만에 다시 환도하고 말았다. 고려 말의 한양 천도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역성혁명을 통해 새롭게 개창한 조선은 국초에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하고 천도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수도로서 크게 번성하였던 한양의 이면에는 고려시대의 남경시절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

경복궁
종묘
사직단
한양도성
성균관 명륜당
도성대지도(서울 역사박물관 소장)
정선의 세검정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복궁
종묘
사직단
한양도성
성균관 명륜당
도성대지도(서울 역사박물관 소장)
정선의 세검정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세기 말 15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을 창건하고, 그로부터 2년 뒤 새 나라의 수도를 서울(당시 한양)로 옮겼다. 서울의 인문지리적 측면, 경제·군사적 이점, 효율적인 국토 이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울은 단순히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된다.
조선시대 서울은 진산인 삼각산(오늘날의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산세를 따라 백악(북쪽), 인왕(서쪽), 낙산(동쪽), 목멱(남쪽) 이렇게 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청계천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굽이쳐 한강에 합류한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자연 형세를 배경으로 성곽과 성문이 자리 잡고, 그 안에 궁궐, 종묘와 사직, 관아와 시전 등의 시설물이 입지했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의 완공을 시작으로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됐으며,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사간원 등의 통치 기구가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 일대에 자리했다.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중등 교육기관인 4부 학당도 사대문 안에 건립했다. 이로써 서울은 정치·행정의 중심지 모습을 구축해 나갔다.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변방의 급한 소식은 봉수를 통해 중앙으로 보고됐다.
한편 16세기 말 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겪게 됐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조선 사회를 비롯해 서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정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정비하는 한편, 한양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수도의 방위 체계를 수립해 나갔다.
이후 서울은 정치·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상업도시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신분별로 지역별 주거지 특징이 나타나기도 했다. 청계천 북쪽 일대인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청계천 이남 지역인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종로 일대에 형성된 시전은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업지역이 종로 시전에서 벗어나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시장까지 확대됐다. 여기에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서울의 학문과 문화의 변화를 동반했다.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경향이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도 출현했다. 이와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됐다.
18세기 서울 일대를 진경산수화풍으로 묘사한 정선은 관념적이고 명분론적인 사고를 대신해 현실에 대한 자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항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는 조선 후기 도시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항인들이 서울의 문학과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서울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개항기와 대한제국기

황궁우
석조전
정관헌
덕수궁 전경
독립문
황궁우
석조전
정관헌
덕수궁 전경
독립문
1876년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서구 열강과 수교하고 각종 개혁이 진행됐으며, 서울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개항은 서울의 경제적 위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무역과 외국인 진출의 거점으로 출현한 개항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인천 등지의 도시화가 진전됐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가 차원에서 서울이 차지하던 경제적 비중이 개항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서울과 지방을 이어주는 철도 등 교통이 발달하자 서울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도 증가했다. 조선시대 도성경제의 주축이었던 시전상인들은 종로의 소매점으로 존속하거나 근대적 기업가가 되기도 했다. 중간 상인이었던 객주는 정미공장을 건설하기도 하고 회사, 은행, 공장 등을 설립하는 신흥상인으로 변모했다.
서울은 개항 이후에 계층 구성이 변했고, 각 계층의 사회적 위상도 변화했다. 우선 농업·철도·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노동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위한 취업 알선 단체 등이 생겨나기도 했다. 도시빈민층의 문제도 심각하여 서울에서는 이들을 위한 구제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했다. 또한 서울에 여성교육기관들이 설립되면서 서울은 여성들의 자각과 사회적 변화를 선도해 나갔다.
서울은 개화문물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개화지식 전파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신문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발간됐고, 출판활동 또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범학교와 외국어학교, 의학교를 비롯한 개화를 이끄는 관공립학교도 서울에 우선적으로 설립됐다. 서양식 가옥· 음식·의류·신식 운송 수단인 전차 등 외국의 문화를 제일 먼저 접할 수 있는 곳도 서울이었다.
개항 이후 서울의 도시경관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존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의 상징적 도시경관은 경운궁(덕수궁)과 정동지역의 이국적인 도시경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1907년 이후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 숭례문 주변 성곽이 훼철되고, 수도로서의 경관체계가 위협받게 됐다.
한편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독립문·환구단·탑골공원의 건립, 방사선 도로의 개통 등 수도 서울은 황도(皇都)에 걸맞게 바꾸는 도시개조 사업도 실시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때 일제의 강압으로 주권이 훼손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대한제국 때의 광무개혁은 좌절되고, 1910년 일제에 강제병합 됐다.

일제강점기

탑골공원
서대문형무소
승동교회
명동일대
서울역 일대에 세워진 강우규 동상
수운회관
부민관 건물
일제강점기 경성 시내 전경(출처 : 일본지리대계12)
탑골공원
서대문형무소
승동교회
명동일대
서울역 일대에 세워진 강우규 동상
수운회관
부민관 건물
일제강점기 경성 시내 전경(출처 : 일본지리대계12)
조선왕조의 도읍이자 대한제국의 황도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경기도에 속한 경성부라는 일개 도시로 격하되었다. 행정구역도 부제 실시와 함께 1/8로 축소되어 사대문 안의 도심부와 일본인 거류지였던 용산으로 줄어들었고, 이전 지역은 경기도로 편입됐다. 당시 서울은 한국인이 주로 거주했던 북촌과 일본인이 주로 거주했던 남촌으로 구별되는 이중적 도시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이 같은 도시 구조는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변화하였다. 도시 외곽지역으로 인구가 늘어나게 됐던 것이다. 주변부 인구의 현저한 증가는 1936년 서울 영역의 대폭적인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기존의 남촌과 북촌 중심으로 하는 표주박형 구조는 경기도에서 편입된 지역을 포괄하는 부채꼴형 구조로 변하게 되었다.
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1920년대 초부터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는 조지아, 미나카이 등 백화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도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는데, 19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등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북촌에는 전통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도시형 한옥이 늘어났다.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가 등장했고, 서양 영화는 더 이상 낮선 문화가 아니었다.
한편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만주와 연해주를 거쳐 미주 한인사회로까지 확산됐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는 항일독립운동의 발원지이자 시발점이 됐다. 3·1운동 이후 각처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서울과의 연고를 강조하는 한성정부를 계승했음을 확인한 사실 역시 서울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상징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은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기 때문에 항일투쟁의 최종적인 공격과 파괴의 대상이 됐다. 일제 역시 같은 이유로 탄압조직과 인력을 서울에 집중시켰다. 한국인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수행했던 경찰서와 법원, 군부대 등 핵심 기관들이 서울에 집중되었다.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순국했던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곳도 서울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통해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서울은 침략을 뒷받침하는 병참기지의 중심축을 담당하였다. 1940년대 들어 서울에서 열린 각종 전쟁 찬양대회들은 식민통치의 핵심이 한국인들을 이용하는 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중심에는 서울이 있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 바로 옆의 부민관에서 열린 침략전쟁 선전대회장에 폭탄을 던진 의거는 독립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의 허위선전과 전시강제동원에 맞섰던 서울시민의 저항 의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4.19민주묘역
88올림픽을 기념하는 세계 평화의 문
잠실종합운동장 모습
서울월드컵경기장 야경
서울광장에서의 2002년 월드컵 응원 모습
잠실대교 야경
남산전경
4.19민주묘역
88올림픽을 기념하는 세계 평화의 문
잠실종합운동장 모습
서울월드컵경기장 야경
서울광장에서의 2002년 월드컵 응원 모습
잠실대교 야경
남산전경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비로소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광복 직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남북은 분단되었다. 38도선 이남을 통치했던 미군정은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을 기하여 미국 도시에서 실시하는 자치헌장을 본받아 〈서울시헌장〉을 발표했고, 9월 18일에는 경성부에서 서울시로 바뀌고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에는 서울시가 서울특별시로 전환되어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62년 2월 1일 서울특별시장이 장관과 동격이 되어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고, 서울특별시가 내무부 산하에서 국무총리 직속으로 바뀌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파손된 정부기관 건물만도 4,967동이었고, 은행과 병원을 비롯한 공공시설과 일반 건물 등의 파괴는 헤아릴 수 없었다. 3년여에 걸친 전쟁 동안 서울시민 150만 명 중 11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 생계수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여 1970년에는 500만 명을 넘어섰고, 1988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서울의 면적도 1949년에 광복 직후보다 2배가 늘었고, 1963년에 다시 2배 이상이 늘어 596.50㎢가 되었다. 1973년에 다시 627.06㎢까지 늘어났다가 다소 줄었으며, 오늘날 서울의 면적은 제주도 면적의 3분의 1에 달한다.
서울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수립 축하식이 열렸고, 1960년 4·19혁명 때에는 시위대가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1961년 5월 16일 새벽에는 쿠데타세력이 한강을 건넜고, 1970년에는 전태일 열사가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보호를 외치며 분신했다. 또한 1987년 서울시청 앞에서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려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렸고, 1994년과 1995년에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개발시대의 부실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되었을 당시에는 시청광장에 붉은 악마들이 모여 선진적인 응원문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서울은 한국 경제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 들여온 제분·제당·방적 등 원조물자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삼백산업을 시작으로 서울의 제조업이 점차 되살아났다. 1960~1970년대에는 가발과 의류 등 섬유류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을 중심으로 서울의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등포와 구로를 중심으로 건설된 공업지대는 한국의 경제발전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이 들어서 정보통신산업을 이끌었다. 지금도 대기업 본사의 대부분이 서울에 소재하고 있어 서울의 경제적 위상은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도시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매년 홍수가 범람하던 한강변을 정비하기 시작했으며,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까지 수많은 도로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강북으로 밀집된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한적했던 농촌지역인 강남에 대한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와 함께 서울에 가득했던 판자촌들이 헐려가고 그 자리에는 대형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러한 개발의 과정에서 일어난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은 개발지상주의가 낳은 참사였다. 서울은 개발지상주의가 갖는 폐해를 직시하면서 사람의 삶이 우선하는 도시 건설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이다. 남북 분단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성황리에 대회를 마무리함으로써 짧은 시간 동안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높은 성취를 이뤄낸 한국의 성과를 전 세계에 알렸다. 21세기에 들면서 서울시는 문화·환경·복지·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일류도시가 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서울시가 추구하는 일류도시란 사람 향기가 가득한 따뜻한 도시, 자연을 닮은 쾌적하고 편안한 녹색도시, 세계를 담는 활기찬 도시, 유구한 역사문화 도시를 일컫는 것으로, 서울시가 추진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서울은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지닌 일류도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